내촌목수 이정섭의 집 비싸지도 불편하지도 너무 멋있지도 않은, 젤 무난한 집, 2008

이정섭이 지은 내촌 손님집을 보고 있자면 면의 분할과 물성의 대비와 그들 간의 조화와 비례와 균형이 주는 고상함과 상괘함과 소슬함이 사람의 본성(마음)을 얼마나 깊이 만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 놀라곤 한다.

홍천군 내촌면에 목수 이정섭이 집을 지었다. 내촌면은 홍천읍내에서 다시 구비구비 구절양장을 수십 킬로 달려야 닿는곳이다. 거기 아직 마흔도 안된 이정섭이 7~8년 터잡고 산다. 그냥 사는 정도가아니라 ‘내촌목공소’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타운’ 이란 과장이고 이정섭이 제 손으로 내촌에 지은 집은 지금껏 총5채다. 우선 목공소를 짓고 다음 살림집을 짓고, 만든 가구를 늘어놓을 전시장이 필요해지자 그걸 다시 지었다. 내촌목공소가 차츰 소문나고 찾아오는 客(객)이 늘어나자 그들을 재울 ‘게스트하우스’가 필요해져 작년에 집 하나를 더 지었고 미리 와살던 화가 친구를 위한 이웃집도 지었다. 그 7~8년 새 집 짓고 나무 다루는솜씨가 늘어나 최근작인 ‘게스트하우스’는 집 자체가 안 보면 그립고, 보면 또 보고 싶은, 일종의 조각품이 돼 버렸다.

01 혼자서 꼬박 넉달 동안 옆도 안 보고 지은 내촌집은 흙이 왜 최우수 건축재인지를 증명하는 실험실이다. 겨울엔 춥지 않고 여름엔 덥지 않다. 비가 와도 눅눅하지 않고 가물어도 건조하지 않다.

02,03 그가 만든 ‘단순하고 덤덤하고 튼튼한’ 책상과 의자와 식탁은 안목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조각품? 나는 집을 예술이라고 요란을 떠는 이들 때문에 정작 동네풍경을 다 망쳐놓았다는 개탄에도 동의하지만 집은 외관 자체만으로 미적 완결성을 지니는 미술품이라는 견해에도 적극 찬동한다. 특히 이정섭이 지은 내촌 손님집을 보고 있자면 면의 분할과 물성의 대비와 그들 간의 조화와 비례와 균형이 주는 고상함과 상쾌함과 소슬함이 사람의 본성(마음)을 얼마나 깊이 만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 놀라곤 한다.

집은 공간 위에 솟은 회화이고 내부로 진입합 수 있는 조각이다. 나는 아름다움에 탐닉해온 사람이고 지금껏 전국의 좋다는 집들을 두루 구경 다녔다. 그렇지만 내촌 손님집 앞뜰에 놓인 너럭바위에 않아 눈앞에 놓인, 조촐하되 돌올한 미적존재를 바라볼 때의 미감이 기중 울림이 깊었다고 주저 없이 말할수 있다. 무의사 대웅전의 인방선이 고려시대 미니멀리즘의 절정이라면 내촌목수가 내촌 손님집에서 구현한 창과 문과 벽의 라인과 빛깔과 질감은 21세기 한국건축이 그 천년 후에 도달한 차분한 꼭지점이다. 시멘트, 유리, 샷시같은 현대적 건축재가 전통한국의 담백한 미의식을 어떻게 표현해내는지에 대해서도 침착한 웅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무를 구하고 흙을 져와서 산골짜기 안에 지은 ‘민가’

편의상 여기서는 내촌 살림집과 내촌 손님집 둘로 나누어서 말해야겠다. 먼저 지은 살림집과 나중 지은 손님 집은 재료도 구조도 외양도 용도도 다르다. 그러나 건축적 성취는 비슷해서 날더러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망설이느라 날 밤을 새울지도 모르겠다.

살림집은 흙집이고 민가다. 그는 한옥대신 ‘민가’ 라는 말을 선호한다. 예전이라고 다들 덩실하게 기와 올린 부자집만 있었던 것도 아닐텐데 한옥이라면 왜 널찍한 칸살에 솟음대문 달린 큰 집만 연싱하느냐는 거다. 대갓집이 아닌 평범한 민중들이 흙을 재료로 지었던 옛집을오늘 재현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부르는호칭은 마땅히 ‘민가’ 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목수 이정섭이 경남 악센트로 진지하게 말했을 때 나는 엄청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독특한 어법을쓴다. 말은 어눌하되 단어선택은 적확하고 어미는 사투리이되 문장은 세련되고 함축적이다. 그래서 그와 별 것 아닌 잡담 몇 마디를 나눈 후에도 메모를 해둘 걸 그랬지, 식으로 혀를 차며 아까워 하게 된다.

칭찬이 과한 감이 있지만 서울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젊은 친구가 서울서 살지 않고 산골에 홀로 틀어박힌 것도 신통하고 제 손으로 제가 살 집을, 아니 자그만 동네를 지어놓고사는 것도 방통해서 나는 내촌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돈다. 그런 내게 이정섭은 “다시 생긱해봐도 내가 한 일 중에서 기중 잘한 게 집 지은 일이라예. 다른 사람들도 한번쯤 해볼 만한 일이지예. 집 짓는거 실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이라예. 자본주의의 필요 때문에 일을 자꾸 분업화하는 바람에 비숙련공의 정성 어린 노동이 없어져 버렸 어예. 전에는 목수나 미장쯤은 왠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거든예. 그리고 실은 그런 노동 안에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 들어있는 거 아니라예?” 했었다.

‘비숙련공의 정성어린 노동’ 이 없어져 버리면서 ‘삶에서 맛볼 수 있는 최상급의 기쁨’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은 이 시대 물신주의의 핵심을 찌른다. 물건을 사고 사고 또 사도 짧은 만족밖에 얻을 수 없는 상업주의의 속성이, 거기 매몰돼 허덕이는우리를 치료해줄 처방의 핵심이 젊은 목수의 이 말 안에 다 들어있다. 말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는 실제 행동으로 실천했다. 나무를 구하고 흙을 져오고 잔돌을 주워서 산골짜기 안에 살림집을 지었다.

튼실하고 상쾌한 내촌목수의 테이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고 말하는 대신 이정섭은 “포스터그리기 대회 같은 데서 상을 독차지 했지예. 그거는 색칠할 때 크레파스를 선 밖으로 나가지 않게 칠했기 때문이지 딴 건 아니라예”라고 간단히 눙친다. 가출을 반복하며 삐딱하게 굴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서울대학이란 곳이 대단하다고 해대고 마침 천재로 대접받는 손윗 형이 그 학교를 다니고 있어 응시해 봤더니 덜컥 합격을 한다. 입학 후엔 되려 실의와 회의, 모색과 방황이 이어졌다. 카메라를 메고 지하철 2호선을 순환하면서 어두운 군상들을 사진 찍는 작업, 그걸 다시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 그걸 다시 지하철 구내에 전시해두고 화면 속 인물과 실제 인물의 부딪침을 지켜보는 작업들을 했다. 세상의 모순과 허위에 온몸으로 부딪치고 싶었다. 순정하고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울까. 서울은 싫었다. 자본주의적 상업구조 속에 끼여드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지예. 돌사진 웨딩사진도 몇 번 찍어봤는데 힘만 들고 돈도 안되데예.” 막연히 집짓는 일이라면 매달릴만 할텐데 싶었다. 하루는 친구집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데 6시 내고향 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한옥 짓는 강습을 해 준다는 내용이 나왔다. 당장 그곳 영월로 달려갔다. 그 한옥학교에서 전통한옥 짓는 방식을 두루 배웠다. ‘사괘맞춤’ 이라는 보와 기등과 서까래의 연결법도 배우고 심을 넣고 흙을 이겨 넣어 심벽 쌓는 법도 배웠다. 나무 만지는 게 좋았고 흙과 돌의 촉감도 좋았다. 머리 속에 그려본 공간을 눈앞에 현실로 드러내게 만드는 과정이 좋았다. 친구 부모님이 사실 시골집을 지어주면서 집짓기 실습도 했다. 스승의 집도 하나 옛방식대로 옮겨서 지어드렸다. 정성 어린 노동이 주는 깊은 만족감을 맛봤다.

01,02 실내 디테일이 여기저기 참신하다. 기둥을 적절히 쪼아 미리 선반을 만들었고 욕실엔 돌멩이를 박아 비누대로 쓰고 목욕실 창을 크게 내어 목욕 중에 숲을 실컷 내다보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03 내촌집 창밖으로 풍경과 함께 보이는 꽃피고 잎지고 바람부는 풍경은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다.

주문받지 않고 자기가 머릿속에 그리는 걸 손으로 만들긴 하되 만든 이후에 물건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돈을 내는 방식은 뭘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찾아낸 게 가구였다. 그래서 이정섭은 집짓기 대신 나무를 깎아 테이블을 만드는 목수가 됐다.

그러나 집짓는건 암만 좋아도 재미로 뚝딱거릴 일이 아니었다. 비용이 만만찮아 섣불리 달려들 수가 없었다. 주문을 받아 지어주면 되겠지만 그러자니 집주인의 의견과 제 의견이 부딪칠 때 조율하는 게 난감했다. 요컨대 주문자의 눈치를 보는 것이 내키지 않았 다. 주문받지 않고 자기가 머릿속에 그리는 걸 손으로 만들긴 하되 만든 이후에 물건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돈을 내는 방식은 뭘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찾아낸 게 가구였다. 그래서 이정섭은 집짓기 대신 나무를 깎아 테이블을 만드는 목수가 됐다. 가지가 원하는 ‘단순하고 담담하고 튼튼한 책상과 의자와 식탁을 만들었다. 안목있는 사람들이 차츰 이정섭의 기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서너 번의 서울 전시를 통해 그는 이미 출품작 전부를 파는 인기 있 는 목수가 돼 버렸다. 그의 테이블은 튼실하면서 동시에 상쾌하다. 튼실함이 하강이고 상쾌함이 상승이라면 이정섭 가구는 그 균형점을 정확하게 포착할 줄 안다. 전시회에 들른 관객들은 일본 유명 목수(목수가 아니라 가구 디자이너라고 불리지만) 조지 니까시마의 가구가 수 천만원에 팔려나갔다면 내촌목수 이정섭의 테이블도 그보다 못할 게 없다고들 평했다.

살림집의 앞면은 선과 면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림

목수로서의 최종 도달점을 묻자 이정섭은 “내 가구는 지금 이대로 만족이라예. 기구가 이만하면 다 된 거 아닌가예?” 라고 일견 건방지게 들리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는 덧붙인다. “나는 늘 세계 최고의 나무를 고집해예. 가구는 어떤 나무를 쓰느냐가 80%를 차지하고 목수가 하는 일은 20% 밖에 안 되거든예. 원래의 나무 결을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 보여주는 가가 목수가 할 고민이지 딴 건 아무 것도 없거든예.”

내촌은 마땅한 땅을 찾다 오직 값이 싸다는 장점을 보고 들어온 땅이다. 북향의 깊은 골짜기라 주변 시세보다 절반 이하였다. 남이 외면하는 골짜기 천 여평, 거기 우선 바라크처럼 시멘트 블록을 얹어 내촌목공소라는 간판을 걸었다. 다음엔 당연히 몸담고 살 살림집 차례! 오래 꿈꾼 일이었다. 돈이 부족하니 비싼 재료는 언감 생심이었고 주변에 흔한 재료를 모아들였다. 대들보와 기둥꺼리는 우리 소나무로, 서까래는 수입 소나무로 구해왔다. 주변에 지천인 게 흙이었고 산골짝에 버려진 잔돌도 많았다. 혼자서 꼬박 넉 달 동안 옆도 안보고 지었다. 목수노릇이야 제 전공이니 말할 것도 없고 미장도 타일도 전기도 수도도 보인러일도 모조리 혼자서 다했다. “공사기간을 줄일 필요가 생겨서 막바지 열흘만 품을 몇 샀지예.”

손님집과는 또 다르게 살림집의 앞면도 창과 문과 인방이 이루는 선과 면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 인방을 제 맘먹은대로 가로지르기 위해 벽은 흙벽돌로 편하게 쌓아올릴 수가 없었다. “이런 방식을 심벽이라고 불러예. 전에는 수수깡같은 걸 썼지만 이건 나무막대를 얽어놓고 그 새로 짚을 썰어넣은 흙을 이겨서 찬찬히 쳐넣었지예. 대신 뒷벽은 편하게 흙으로 벽돌 찍어서 올렸고예.” 겉으로 보기 좋다고 밖에서 보고만 있을수는 없다. 안으로 들어가서 좋아야 집이다. 내촌집은 흙이 왜 최우수 건축재인지를 증명하는 실험실이다. 이 집의 온도는 바깥온도와 능히 6~7도는 차이가 난다. 겨울엔 춥지 않고 여름엔 덥지 않다. 비와도 눅눅하지 않고 가물어도 건조하지 않다. 게다가 포근하고 안온하고 순후하다.

“한번볼래요? 담배 피워도 냄새 하나도 안나예. 천연공기청정기가 내장돼 있어에.” 담배연기가 거실 천정으로 빠르게 빠져 올라가는 모양을 이정섭은 주인답게 실험해 보여준다. 실내는 26평. 주인방과 손님방이 거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본다. 방문과 욕실 앞까지 작은 툇마루가 놓였다. 걸터앉기 최적이다. 침실은 당연히 온돌이다. 온돌을 달구는 아궁이가 집밖에 있어 군불땔 때마다 외기를 쐬란 법은 없다. 그의 집 거실 귀둥이엔 평면에서 무릎깊이 정도로 꺼진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를 실내에 둔 건 열손실을 줄이려는 이유도 있고 목공일의 잡다한 나무 찌꺼기를 태우려는 목적도 있고 어쩌면 아궁이가 환기하는 이미지를 위해서일 수도 하다. 본디 장식성을 질색하는 이정섭은 이런 말을 거부할른지도 모르지만 내 보기에 그 아궁이는 어떤 인테리어보다 탁월한 그 집의 개성이자 장식이다. 창밖 골짝에 꽃피고 잎지고 바람부는 풍경이야 시골이니 으레 그렇다 치지만 내촌집 아궁이 앞에 앉아서 맛보는 순도 높은 평화의 원인은 뭘까. 집안은 나무향내로 꽉 차있다. 나무 냄새가 인간의 대뇌 속 변연계에 작용해 엔돌핀이나 도파민같은 호르몬을 분비하게 만드는 게 확실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정섭의 거실에 들어온 외부인들이 대개 코를 벌름거리며 모종의 최면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확인했다.

거실 귀퉁이에 자리잡은 아궁이는 그 어떤 인테리어보다 탁월한 그 집의 개성이자 장식이다. 나무향내로 꽉 차 있는 아궁이 앞에 앉으면 순도 높은 평화를 맛볼 수 있다.

실내 디테일도 여기저기 함신하다. 기둥을 적절히 쪼아 미리 선반을 만들었고 욕실엔 돌멩이를 박아 비누대로 쓰고 둥그런 나무 욕조는 바깥에서 불을 때 물을 데우는 방식이다. 변기는 실내에서 추방했다. 집 뒤로 열 걸음 걸어가는 산 아래 재래식 푸세식 변소를 뒀다. 욕조에 나무를 때서 물을 데우는 건 기름값이 비쌀 경우를 대비한 유비무환 장치이고 회장실을 밖에 둔 건 밭에 낼 거름을 얻기 위함이고 목욕실 창 을 산쪽으로 크게 낸 건 목욕 중에 숲을 실컷 내다볼 호사를 위함이다.

나는 늘 세계 최고의 나무를 고집해예. 가구는 어떤 나무를 쓰느냐가 80%를 차지하고 목수가 하는 일은 20% 밖에 안 되거든예. 원래의 나무 결을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 보여주는가가 목수가 할 고민이지 딴 건 아무 것도 없거든예.

쿡 찌르면 기대 이상의 답변이 툭 떨어지는 성능 좋은 인간 이정섭에게 내가 묻는다. “그대가 생긱하는 집의 이상은?” “무난한 집이 제일 좋은집이라고 생각해예. 근데 무난한 집이 잘 없잖아예. 이 집이 전국에서 젤 무난한 집 아일까예? 비싸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멋있지도 않잖아예.”

그 이정섭이 다시 집짓는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대목에서 소목으로 다시 소목에서 대목으로! “가구도 다 집짓는 사괘맞춤 방식으로 만들었지예. 인제 집을 가구만들듯 한번 지어보고 싶어예.” 내촌목공소엔 그를 선생님이라 호칭하는 젊은 친구들이 넷이나 숙식을 함께 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이루는 작은 혁명을 주시한다.

뒷말 이정섭이 이 골짝에 들어온 후 산간오지 내촌면은 작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면사무소 근처의 낡은 감자창고, 쇠락한 시골 철물점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감자창고는 역사와 사연을 지닌 갤러리가 되어 그림을 전시하고 ‘내촌철물점’ 과 ‘내촌상회’는 세계 굴지의 빼어난 디자인 명품을 수집 판매하는 건축인테리어 소품점이 되었다. 젊은 목수 하나가 깊은산골을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21세기적 문화공간으로 바꾸고 있다. 거기 이정섭표 ‘민가’ 가 하나 둘씩 들어서는 날을 설레며 기다린다.

글 김서령 생활칼럼리스트

사진 서봉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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