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n 김민식의 나무노트, 2012/05-2014/02

이정섭

좋은 물건을 정직한 노동으로 구현하는 목수

1971년생. 내촌목공소 대표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태백의 한옥 학교에서 집 짓기를 배웠다. 가구를 짓는 소목, 집을 짓는 대목을 넘나드는 천상 목수다. 2002년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 내촌목공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국내외에서 다수의 가구 전시회를 열고, 여러 채의 살림집과 작업 공간, 전시장을 지 었다. 본질적 아름다움, 쓸모 있음, 견고함을 가구와 건축에서 보여주는 그는 SPA 브랜드가 판치는 패스트 소비 시대에 정직하고 좋은 물건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되묻게 한다.

13년 동안 목수로 살아온 이정섭은 일을 많이 해 관절이 많이 망가졌다며 평소 50보 이상 보행 금지라고 농담을 던졌다. 본질적 아름다움과 쓸모를 육체노동으로 구현한 그의 손은 거칠고 투박하다. 한국 사회에 목수 열풍이 불기 이전부터 강원도 산골에 틀어박혀 가구를 만들고 집을 지은 이정섭은 창조나 영감 같은 허울 좋은 단어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정직한 가구와 건강한 집을 만드는 데 고집스럽게 매달려왔다. 원초적 아름다움을 원시적 방법으로 구현한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사물의 원형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한 한국성을 발견한다.

마산이 고향입니다. 고등학교 때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갔습니다. 범상치 않은 사춘기를 보냈을 것 같은데요. ’10대 시절의 이정섭’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자주 받은 질문인데 또다시 질문하니 새삼스럽네요. 어린 나이에 당시 입시와 사회 체제가 인간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졸업장을 받는 건 그런 사회 체제에 내가 동의한다는 뜻이라고 여겼죠. 부모님이 모두 교사라 쉽게 학교를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무조건적인 반항이었어요. 시험지 돌리는 시간에 답안지 제출하고, 온종일 오락실에 있다가 선생님께 끌려가고, 선생님들의 일장 연설을 비웃다가 많이 맞기도 했죠. 가출도 했어요. 그런 유치한 행동을 한 데에는 순간적으로 더 강해 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다 제 고집대로 자퇴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부모, 형제, 처자식하고 얽히고설킨 관계 때문에 살면서 참는 것을 저는 무시해버려요. 서울에서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그다음 날 바로 짐을 싸죠. 가슴 아프지만 자퇴한 뒤 얼마간 방황하다가 결국 세상과 타협했어요. 대학을 가지 않고도 이 세상을 월씬 멋지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기 힘들다는 걸 안거죠.

원래는 순수예술을 전공했습니다. ‘지하철 2호선’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는데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휴학했어요. 취직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 미대생이라 술 마시면서 잡념에 빠지는 시간이 많았어요. 다시 대학에 간다면 여전히 서양화과를 선택할 것 갈아요. 미대를 꾸역꾸역 다니는 동안 미술이란 걸 오래 곁눈질하다 보니 뭔가를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솔직히 제게 현대미술을 생산할 수 있는 재능이 부족했어요. 더구나 당시 저는 미술관의 미술이 아니라 대중의 미감을 끌어몰리는 공공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공 미술을 개척하려 노력했지만, 2000년대 전후의 우리 사회는 공공 미술에 대한 사회적 기반이나 합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다 자연스레 접게 된거죠.

어떻게 목수의 길을 가게 되었나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태백에 있는 한옥 학교를 알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대목 일을 배웠죠. 우리나라는 타인의 전문 영역에 대해 비밀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있는 같아요. 내 전문 영역 이외는 모두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구조죠. 저는 사회·정치적 의미에서 반자본주의자가 아니라 분업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반대하는 의미에서 반자본 주의자예요. 어느 책에서 인간으로서의 총체성, 저는 이걸 ‘인간의 존엄’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을 확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옛날에는 자기가 필요한 옷이나 집을 직접 만들면서 인간 총체성의 일부분을 조금씩 확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분업화되면서 인간의 총체성이 잘려나가자 인간이 누려야 할 자연스러운 행복도 잃어버리게 된 거죠. 내가 기능적으로 잘할 수 있는 일 딱 하나만 하면 되는 거예요. 라면을 잘 글이는 사람과 못 끊이는 사람의 차이는 있겠죠. 그렇지만 누구나 라면을 끓일 수는 있어요. 나무는 다루기 쉬운 재료입니다. 목수 일도 간단하게 배울 수 있고요. 이런 가치관을 실현할 삶의 방편으로 선택한 게 목수일 뿐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정직하고 성실한 내 노동력과 부끄럽지 않은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야겠 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내촌2 프로젝트
2013년 시작한 내촌2 프로젝트는 현재 15채 대지 중 6채나 들어섰다. 일종의 ‘타운’인 셈. 이정섭의 살림집과 작업장, 전시실, 그리고 지인들이 주병 땅을 사들여 세운 집들이 있는 내촌1 프로젝트 옆에 있다. 모두 이정섭이 직접 지었다.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세공의 집’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정섭 목수의 집은 문고리, 조명, 화장실 잠금장치, 전기 콘센트 덮개까지 모두 이정섭 목수가 직접 만든다. 이 집에 가정 잡 어울리는 맞춤형 재료를 써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것. 이정섭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맞배지붕으로 집 짓기를 고집한다. 사진 이창화 기자

2002년에 내촌목공소를 설립했습니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 있어서 ‘내촌목공소’인데, 목공소를 설립할 당시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목수가 되기까지 김진송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그분께 부채 의식이 있어요. 우연히 [목수 김진송]이라는 전시 제목을 봤는데, 그걸 본 순간 나도 목수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어 요. 내촌에 오면서 단순히 공방을 넘어 지역사회에 전형적인 모범이 되는 기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동네 이름을 굳이 넣은 이유죠. 2002년 내촌은 지금과 달리 근대 모습이 많이 보존된 동네였습니다. 내촌의 근대적 풍경과 내가 만드는 좋은 물건이 결합하면 이 동네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어요. 집 짓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엔 당시 제 경력이 부족했어요.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무분별하게 집을 짓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가구를 먼저 만들기 시작했지요. 저는 소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업이란 것에 대 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내촌목공소 가구가 이케아 가구도 아니고, 한 달에 한두개 팔리는 걸로는 회사 유지가 힘들더라고요. 365일 하루도 안 쉬고 일하며 몸으로 때우는 데도 한계가 있었어요. 개인전도 하고, 서울 리빙디자인페어에 조지 나카시마 바로 옆 부스예 나가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재 전문가인 김민식 고문님과 함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내촌목공소는 현재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원래는 집을 의뢰하러 온 고객이었어요. 그런데 둘 다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술친구가 됐죠. 평생 목재 관련 일을 하신 분이에요. 참나무 중에서 제일이라는 펜실베이니아 오크, 오스트리아에서 건조한 탄화목 등 전 세계 나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요. 아마 한국에서 나무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일 거예요.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 공장을 모두 직접 다녔으니까요. 목재 전문가인 걸 안 뒤 자연스레 같이 비즈니스를 하게 됐어요. 제게 새로운 재료의 세계를 열어준 분입니다. 제가 대표이고, 김민식 고문은 감사 이사예요. 현재 내촌 목공소는 목수 4명, 설계자 2명, 경리 1 명, 그리고 저와 김민식 고문, 이렇게 모두 9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가, 목수, 장인,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함이 있지만 놀 ‘목수 이정섭’을 내세읍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말하는 목수는 디자인하는 사람과 가공하는 사람이 분리되기 이전에 전반적인 것을 아우르고 책임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도면대로 재현만 하는 하청업자로 전락하기 전의 목수입니다. 제작자가 물성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밖에 없습니다. 나무를 다루는 작업은 디자인과 제작이 분리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2003년 고객에게 보여줄 샘플로 만든 게 내촌목공소 옆에 지은 자택입니다. 서너 달 동안 혼자 지었다고 들었는데, 실제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요?
사실 목수로서 가구보다 집을 먼저 시작했어요. 이 살림집은 직업적인 목수가 자신이 살 집을 전통 방식으로 지은 거죠. 이 집을 통해 실수와 부족한 점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초반에 단열을 신경 쓰지 못해 후에 보강 공사를 했습니다. 뒷마당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뒷산을 깎아서 집을 지었고요. 자연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말로만 알았던 거죠. 집을 짓고 4년 뒤에 깨달았습니다. 집은 조경 설계의 부산물뿐이라는걸요. 또 집은 기능, 방범, 단열, 방수 등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주지로서의 기본을 알맇 됩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 하면서 동시에 안전한 집을 만들어야 해요.

내촌목공소 살림집 1
2003년 서너 달 동안 이정섭 목수가 홀로 지은 집미다. 온돌을 달구는 아궁이를 내부로 끌어들였다. 외부로 빠져나가는 열 손실을 줄이고, 목공 작업 이후 남은 나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사진 이창화 기자

이정섭 대표의 집 짓는 방법을 특집으로 소개한 월간 [공간] 2011 년 4월호 기사 중 ‘작은 집은 도면 없이 짓는다’, ‘벽돌 세워봐야 다음 작업에 감이 온다’ 같은 현장성을 중시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 집을 지을 때는 도면을 그릴 줄 몰라서 그런 거예요. 도면 없이 집을 짓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작업자들에게 일일이 내 생각을 설명할 수 없으니 기본적인 도면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무실 책상에서 도면으로 설계하는 것과 물리적인 땅에 집을 짓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현실에서 수정해야만 하죠. 현장에서 더 좋은 동선을 찾았는데 설계 도면대로만 전행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답사로는 한계가 분명 있으니까요. 기둥과 벽 등을 실제 세워보고 마주하면 달라지는 게 분명 있어요. 내촌목공소는 설계, 시공,감리 등 집 짓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합니다. 원안이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수정될 수 있는거죠. 현장에서 주변 환경을 고려해 유동적 으로 바뀌기도 해요.

내촌목공소에서 지은 집을 세간에서 흔히 ‘현대화된 한올’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달리 선생님은 한때 ‘민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어요.
‘한옥’이란 단어, 한옥의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석기시대의 움막, 벼농사를 시작하면서 볏짚을 올려 만든 초가집, 참나무을 쪼개서 지붕을 올린 너와집, 중국에서 들어온 기와를 올린 기와집, 이 모든게 한옥입니다.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살아온 주거 방식이 모두 한목인거죠. 한옥은 삶의 방식과 시대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변화해왔는데, 북촌에 있는 전통 한옥만 한옥이라 정의내리는 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지은 집을 ‘민가’라 표현한거죠. 새마을운동 때 정신과 재료가 한 번에 바뀌면서 이전 주거 방식과의 단절을 겪었습니다. 한옥의 반대 개념으로 양옥이 등장하죠. 중국 기와가 자연스럽게 우리 한옥에 스며들었듯 콘크리트 벽, 입식 주방 역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는데 그롷지 못했어요. 굳이 한 번에 바꾸지 않아도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재료인 시멘트가 유입되면서 볼편했던 주방은 달라졌을 겁니다. 옛날 구조를 그대로 따르는 게 전통의 계승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인이 우리의 생활 방식을 반영해 집을 짓는다면 그게 바로 한목이죠. 그런 보편적 의미에서 제가 지은 집을 이제는 한옥이라고 부릅니다.

목수 이정섭의 작품을 두고 한국성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눈에 보이는 한국성뿐 아니라 굳이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게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안동 하회마을,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보다 김용택 시인의 시를 읽을 때, 섬진강에서 재첩국을 먹을 때, 찌그러진 함석지붕에서 밥하는 연기가 피어 오를 때, 그럴 때 한국성을 느낍니다. 가슴이 뭉클해져요. 이 한국성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직감적으로 느끼는 거죠. 김기덕 감독이 201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수상 소감으로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며 감동받았습니다. ‘아리랑’이 보통 민족에게서 나올 수 있는 노래일까요? 처절한 삶을 산 사람의 노래죠.영화[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런 대사를 하더군요. “이 한을 어찌할꼬.”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천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조선 인구의 반이지요. [난중일기]를 보면 인육을 먹는 건 흔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무능한 조선 시대 왕권 이후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겪었습니다. ‘아리랑’은 이런 역사를 가진 민족이 부른 노래예요.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나 같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거죠. 그런 처절한 세상을 살았던 목수가 책상을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한국성이 담긴 디자인이라는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역사와 환경에 의해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1. 의자, 호도나무
옛날 초등학교에 가면 있을 법한 디자인의 의자다. 장식과 치장이 전혀 없다. 나무 느낌을 그대로 살려 튼튼하고 오래 쓸 수 있는 가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2. 엘리먼트(티ement) 고비, 탄화목
2013년 1월 서울옥션에서 열린 개인전 [엘리먼트]에서 선보인 작업. 너도밤나무를 쪄서 수분을 모조리 제거한 탄화목으로 만든 가구다. 탄화목은 발화점 직전, 그러니까 숯이 되기 직전의 온도를 유지하며 태운 나무다. 조선 목가구를 재해석한 검은색 나무 가구에서 강인한 절제가 느껴진다. 사진 이봉철

‘기본적으로 창조는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로움을 찾기보다 사물의 원형에 가까운 디자인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해요. 바빌론의 건축,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토기 등은 지금 봐도 훌륭합니다. 아주 짧게 거슬러 올라가면 산업화 시대 가구 중에도 좋은 게 많아요. 제가 하는 작업은 여태껏 보아오고 경험한 것들 의 편린을 조합하는 게 아닐까요? 사람이 무엇을 만들든 자기 경험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 조합하지 않나요? 디자이너나 예술가는 창조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어요. 설령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했다 하더라도 그건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단상이 자신도 모르게 발현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완전한 창조는 없다고 봐요.

그렇다면 목수 이정섭의 작업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있나요?
비숙련자이고 목수도 아니었지만 큰아버지가 직접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면서 살았어요. 대나무를 쪼개서 엮은 평상, 고기를 찌는 광주리, 제사 지낼 때 까는 멍석 같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도 직접 만드셨죠. 짚이나 대나무처럼 집 주변에서 혼히 얻을 수 있는 재료로요. 그런 기억이 내게 메커니즘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이젠 편린으로 남아 있죠. 어떻게 연결되어 지금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실제 물건을 만드는 사람으 로서 큰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만들어 사용했으니까요.

원목으로 가구를만드는 사람은 모두 나뭇결을 강조합니다. 비슷한 재료로 비슷한 형태톨 만들기 때문에 비례가 정말 중요합니다. 아주 미세한 감각의 차이인데, 어떻게 비례를 찾나요?
과장해서 말하자면 디자이너가 가구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비례와 면 분할이 전부라고 봐요. 구현하고 싶은 건 극단적인 절제와 이상적인 비례죠. 자연스러운 균형을 이루는 비례를 찾으려고 해요. 이것이 사람의 눈을 가장 즐검게 하는 요소니까요, 디자인했다는 느낌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의도성이 느껴지는 디자인은 개입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물건 자체로 자존감이 있어야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개맞춤 테이블, 참나무
한국 전통 건죽에서 기둥에 들보를 결구하는 가장 기본 방식이 사개 맞줌이다. 한옥에서는 사개맞춤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중요하게 여길 정도. 못을 쓰지 않고 맞추는 이 이음법울 사용해 만든 테이블. 조선 시대 간결한 비례미를 재해석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오랫동안 나무라는 재료를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금속, 도자, 플라스틱 같은 재료와는 다른 나무의 특성은 무엇이 있율까요?
나무는 굉장히 쉬운 재료이면서 객관적이지 않은 재료입니다. 나무로 얼마만큼 정교하게 만드느냐는 또 다른 문제죠. 나무로 침대를 만들면 부러지지 않지만, 유리나 도자기로 침대를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나무가 어려운 점은 딱 하나예요. 환경과 기온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변형되고 뒤틀림이 있다는 것이죠. 이를 어떨게 조절하느나가 관건입니다. 금속, 플라스틱 같은 재료는 무기물이고 나무는 유기물입니다. 유기물에 수분이 들어가면 세포가 팽창합니다. 이런 변형이 싫다면 우레탄 도장을 해서 외부 소통을 막아주면 됩니다. 하지만 원목에 한 겹 덧입히면 목재의 결을 느끼기 어려워요. 개인적으로 나무는 비틀리고 틀어지더라도 그런 변형을 그대로 느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실제 내촌목공소 가구도 변형이 있습니다. 우리는 관전히 건조된 목재가 다시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했을 때 변형되는 확률을 수치화합니다. 장마철에 나무는 4% 팽창해요. 이 말은 길이 1m 테이블이 1m 4cm가 된다는 뜻입니다. 정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런 데이터와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가구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내촌목공소 가구는 테이블이 600~800만 원대, 의자가 200만 원대일 정도로 일반인이 구입하기에는 상당히 고가입니다. 가격을 정하는 기준이 궁금합니다.
우리 사회는 남의 피를 빨아먹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2015년 최저 임금이 5580원이에요. 경기도에 있는 가구 공장에 가면 비정규직도 아닌 동남아에서 온 일용직 노동자들이 가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중소기업 제조업체에서 정규직 직원이 가구를 만들려면 상당한 수준의 매출이 없이는 월급을 제때 줄 수 없어요. 우리 사회는 이미 비상식적인 노동 형태에 익숙해진 거예요. 내촌목공소는 나무 재료값만 몇 백만 원이 듭니다. 또 정상적으 로 안정화된 고용을 통해서 만든 좋은은 물건입니다. 이를 아주 적합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는 거에요. 10만 개씩 팔리는 공업 제품이 아닌 이상 가격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내촌목공소는 좋은 물건을 만들면서 회사까지 운영하기 위한 적정선에서 가격을 정합니다.

최근 전문적으로 목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취미로 목공을 배우는 분도 많고요. 목수에 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목재를 재단하고 붙이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1년이면 누구나 잘할 수 있습니다. 현재 사회적으로 목수라는 직업이 환상으로 부풀려져 있습니다. 목수로서 어떻게 삶을 지속할 것인지, 또한 세상이 어떤 물건을 필요로 하는지 스스로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건축을 하면서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타일공, 미장공, 조적공 중에 젊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환갑 아래로는 기능공이 없어서 이들의 대가 끊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될 정도예요. 젊은 천구들이 자기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2010년 전후로 다양한 소규모 가구 제작 스튜디오가 많아졌습니 다,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또 이들에게 10년은 앞선 선배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면요?
사회격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원목으로 가구를 만드는 소규모 스튜디오가 늘어난 건, 이제 표리일체한 재료를 쓴다는 뜻입니다. 한때 한국에 MDF에 무늬목들 덧입혀 겉과 속이 다른 가구를 만들던, 표리부동한 시절이 있었어요. MDF면 MDF로 보이는 게 자연스럽고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싶어요. 무늬목으로 덧씌운 가짜 물건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건 옳지 않은 사회의 징후라고 봤어요. 내가 목수의 삶을 조금 빨리 시작해 자리 잡은 점이 미약하게나마 사회에 기여했다고 느끼는 부분이에요. 걱정되는 부분도 분명 있죠. 한국 사회에는 아직 원목 가구 수요가 그만큼 없는데, 북미산 활엽수 단가도 만만치 않을 텐데 밥은 먹고사는지 염려가 돼요. 만감이 교차하죠. 대학에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디자이너를 배출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과도하게 많은 수의 디자이너를 무작정 내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을 모두 수용할 만한 사회구조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말이죠. 이건 개인적인 역량을 떠나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내촌목공소의 목표는 좋은 물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물건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란 수필이 있어요. 빨리 해달라는 주문자의 재촉에도 노인은 묵묵하게 자기 마음에 드는 방망이로 다듬어질 때까지 성실하게 작업하죠. 그렇게 만든 물건은 좋을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런 물건 은 좋은 사회 시스템에서 나와야 해요. 만드는 사람에게 충분한 대가가 지불되고, 또 제작자는 그에 상응하는 도덕심을 물건에 반영해야 합니다. 이를 단지 마음만이 아니라 숙련된 기술로 구현해야 하죠.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후딱후딱 날림으로 만드는게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완성도를 높여야 합니다. 이런 전반적인 조건이 맞물릴 때 좀은 물건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정리 임나리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인물 사진 이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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