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증권사보 나무는 죽어서도 산다, 2014/01

나무는 죽어서도 산다 내촌목공소 목수 이정섭의 나무들

아름답고 찬연했던 집짓기 풍경

목수 이정섭을 생각하면 우리 집 짓던 때가 생각난다. 한국전쟁 때 우리 마을은 한 집도 안 남고 모두 소각 되었다.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서둘러 집부터 지어야 했다. 우리 집도 방 한 칸 부엌 한 칸 초가집을 지었다. 초가집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엉성한 천장 틈으로 밤하늘의 별이 보였다. 그 집에는 뱀도, 쥐도, 굼벵이도, 참새도, 귀뚜라미도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새로 지을 나무를 모았다. 깊은 산속에서 기둥감이며, 서까래감이며, 마루 놓을 판자감들을 베어 껍질을 벗겨 산속에 쌓아 말렸다가 큰 비가 와서 산골 도랑물이 불어나면 도랑들에 나무 띄워 보내놓고 마을 가까이에서 건져 올려 집으로 가져 왔다.

오랫동안 그렇게 집 지을 나무를 모아 어느 해 목수들을 불러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하얗게 다듬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집 짓는 우리 집 마당에 들려 먹줄도 잡아 주고, 짜구나, 작은 도끼로 옹이를 다듬기도 하고, 끌과 망치로 구멍을 뚫어 주다가 목수의 좋은 연장으로 자기 집 구유나 여물바가지나 지게들을 만들어 갔다. 목수들은 도면도 없이 나무들을 자르고 구멍을 파고 다듬어 한쪽에 쌓아두었다. 목수들이 연장을 들고 나무를 이리저리 뒤적거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고누며 고민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무를 다 다듬은 다음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어 기둥을 세워갔다.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고 그리고 흙을 얹는 날이왔다. 지붕에 흙은 얹는 날은 마을 모든 일들이 멈추었다. 마을의 남녀노소가 다 우리 집으로 모여 들었다. 어른들은 텃논에 커다란 흙구덩이를 파고 거름기가 없는 황토 흙을 마당에 수북이 쌓아 놓고 짚을 썰어 냇물을 길어다가 붓고 흙을 이겼다. 그날은 흙의 날이었다. 사람들이 흙을 지붕으로 던져 하늘을 막았다. 마을 모든 사람들이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지붕에 흙이 다 올라 갈 때쯤 되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흙칠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흙 묻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떠들고 좋아했다. 흙의 날이었다. 흙의 축제였다. 자기들이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그 아름답고도 찬연한 흙의 날. 흙 묻은 얼굴을 보며 서로 웃던 그 얼굴들을 어찌 잊겠는가. 그리하여 그 집은 ‘용택이의 집’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지은 ‘용택이네 집’이 되었다. 마을의 한 집을 짓는 것은 그렇게 마을의 축제였다. 놀라운 이 공동체적인 집짓기 풍경은 내 머리 속에 하나의 커다란 삶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나무의 결은 아름다운 날들의 흔적

나는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나무 보는 눈을 갖도록 했다. 우리 반이 되면 자기 나무를 정해 놓고 그 나무에서 일어나는 일을 쓰도록 했다. 나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면 나무를 보아야 했다. 그냥 보면 안 되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 그 것이 무엇인지 알고 무엇인지 알아야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어야 비로소 나무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것이 되고 그 것이 내 것이 될 때 비로소 아는 것이 인격이 된다. 아는 것이 인격이 될 때 사람은 나무처럼 가꾸어 진다. 인격, 세상의 아름다움, 정의와 진실, 진심이 통하는 삶의 진정성과 진지함, 세상을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비로운 감동을 잘하는 순결한 마음. 이치와 사리를 분별하는 인격이 갖추어 질 때 사람은 녹슬지 않을 영혼을 갖는다. 창조의 공간과 창의의 영역을 얻는다. 그럴 때만 사람은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갈등을 불러오고 갈등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갈등을 조절하고 조정해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다. 그럴 때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생각을 정리하는 게 인간들의 모든 활동이다. 정리해야, 새로운 것들이 찾아 모여들고 정리해야 새로운 곳으로 나간다. 일상을 그렇게 정리해야 철학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된다. 철학적인 삶의 태도를 갖는 사람은 신념을 얻게 된다. 신념은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을 믿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믿고, 우리가 살아 갈 세상을 믿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만든다. 새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공감을 불러으키고, 그리고 감동을 가져 온다. 예술이란, 예술은, 예술적이라고 할 때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아닌, 그 삶의 정리에 이의가 없어야 한다. 우리반 1학년 어떤 아이가 ‘여름’이라는 글 이렇게 썼다. ‘이제/ 눈이 안 온다/ 여름이니까’ 이 글은 이의가 없다. 이의가 없는 삶의 정리가 예술이다. 의가 없는 삶의 정리를 만날 때 우린 관심과 공감을 넘어 감동한다. 정치가 경제가 예술이 그러해야 한다. 관심과 공감을 넘어선 감동은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나의 운명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꾼다. 혁명이다. 혁명은 그렇게 세상을 밝히며 감동적으로 세상을 바꾸며 온다. 감동은 스며들고 느끼는 것이다. 감동적인 것을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생명력이 있는 것들이다. 생명력, 살아있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바로 자연이다. 감동적인 삶은 ‘자연적’일 때만 가능하다. 자연적이란 사람의 활동에 해당하는 개념인데, 자연에서 가져와 인간 생활에 필요한 작업을 말한다. 살아 있는 것들, 생명력이 있는 것들은 인간의 손이, 마음이 닿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가 더 자연스럽다. 한 그루의 나무, 저기 서 있는 산, 흐르는 물, 햇살과 바람, 풀잎처럼 저 자연은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또 새롭다. 놀라운 일이다. 신비로운 것이다.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새로운 저 자연은 왜 그러한가. 저 자연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보라. 아까와 다르다. 해 뜰 때 다르고 해 질 때 다르고 눈 올 때 다르다. 아! 빈 나무의 가지에 새가 날아와 앉았다. 전혀 다르지 않는가? 새가 날아와 앉아 있는 그 아름다운 날들. 그 질서들이 모여 나무의 결이 된다.

나무의 속살을 이해하는 목수

자연은 지식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이 어찌 다 저 자연을 해석하겠는가. 우리 인간들이 어찌 저 해가 하는 일을 다 알고, 어찌 바람이 하는 일 다 알고, 봄비가, 가을 구름이 하는 일을 다 알겠는가. 다만 알려고 기를 쓸 뿐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연을 죽이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도 자연이어서 살아야 한다. 자연이 우리들의 삶을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그들을 죽여 어떤 모습으로 부활시키느나가 문명의 척도가 될 것이다. 사실, 극도의 모순 속에서 우린 산다. 자연을 죽여 자연스럽게 하려고 하지 않는가. 특히 예술과 철학, 과학 활동은 놀랍게도 자연 속에 숨은 비밀을 찾는 일이다. 재창조라는 말은 어볼성설이다. 인간들의 끊임없는 활동은 폭력이다. 나비가 꿀을 따는 것처럼, 새가 죽은 물과 죽은 나뭇가지와 떨어져 있는 깃털로 집을 짓는 것처럼 우리들도 그 생존의 법칙을 배워야 한다. 건축과 가구는 자연을 가져 오는 인간들의 불가피한 호소가 되어야 한다. 가구와 집은 자연 속에 숨은 질서를 가져오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나무 밑에 가면 편안하다. 바람 부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면 평안하다. 나무에 기대서면 평화롭다. 편안함과 안정감이 그리고 평화가 가구와 집의 최대 가치다. 바람과 햇살과 비가 하는 일을 잘 따르며 자란 나무를 가져와 사람의 몸과 마음에 맞추는 일은 자연 속에 숨어있는 신비로운 감동을 가져오는 일이다. 이름 불일 수 없고 해석 할 수 없는, 스며드는 신비로움 그것이 감동이다. 이정섭은 나무의 속살을 이해하는 목수다. 해와 바람을 충실하게 따르며 결을 만들어 온 그 무늬와 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최대의 노력을 나는 그가 지은 집과 그가 만든 가구에서 본다. 그가 만든 가구 하나하나, 문짝 하나하나, 문고리 하나하나는 전통을 이으면서 전통을 벗어나 현대적이다. 집과 가구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든 양식과 모든 사고의 결집이다. 전통은 현실이 결정하는 일이다. 생명력이란 세월을 무시한 고전이지만, 그 감동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말의 다른 말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불편한 전통은 전통이 아니다. 이 말은 편리함과 안락한 것만을 추구하는 탐욕하고는 다른 말이다. 나는 현대인들이 전통이라고 생각하여 짓는 ‘수구’적인 한옥을 싫어한다.

이정섭이 한옥 목수를 하다가 뛰어나온 뜻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그는 남의 것을 베끼기 싫었던 것이다. ‘오래 된’ 것을 그대로 베끼는 집짓기가 전통을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그 고집은 무지의 소산이다. 이정섭이 만든 집과 그 집에 놓여 있는 침대와 의자와 탁자들은 서로 거스름이 없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하나가 되어 있다. 침대에서 의자로 의자에서 탁자로 탁자에서 마루와 문으로 기둥과 서까래와 개보가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 낸다. 자연스럽다. 방에서 문을 열고 밖을 보다가 다시 눈길이 방안으로 들어 올 때 그 눈길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나는 그의 많은 작업을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또 건축가가 아니다. 그러나 집과 가구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다. 집이 자연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한다. 옛날 한국화를 보면 집과 사람은 아주 작다.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집과 사람은 잘 보아야 보인다. 집도 사람도 자연이었던 것이다. 자연을 읽을 줄 알아야 집도 가구도 만들어진다. 인간이 만들어 낸 그 어떤 것이 그 곳에 놓임으로써 그 주위가, 그 곳이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꽉 짜여야 한다. 균형과 조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집과 가구의 최대 가치일 것이다. 해와 달을 따르며 자란 나무의 숨결을 이해하는 그리하여 그것을 자연 속에 놓았을 때 또 한 그루의 나무가 될 때 가구는, 집은 완성 되어 모든 것들을 또 받아들인다. 자연의 질서에 숨는 것이다. 그러나 집이, 가구가 아무리 좋으면 뭐하나. 그 집과 가구 속에 사는 가족이 사랑과 애정으로 뭉쳐진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그 집은 완성된다.

글 김용택 시인

사진 안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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