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중앙 김서령이 만난 사람의 향기, 2006/05

강원도 홍천의 산골인 내촌에 가서 목수 이정섭을 만났다. 돌아와 며칠 후 다시 내촌으로 갔다. 그에게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이정섭은 말하는 방식이 특유했다. 특유하게 순수하고 결벽스러웠다. 이야기를들으면서 나는 이정섭에게 미리 못을 박아 뒀다.

“당신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글로 옮길 수는 도무지 없을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뉘앙스와 인토네이션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문자언어를 찾아낼 자신이 없다.”

이정섭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여러 경로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었다. 그림 전공한 젊은 친구 하나가 산골짜기에 처박혀 나무를 깎아 탁자와 의자를 만든다더라. 집도 제 손으로 지었다더라. 보기에 참좋다더라.

남의 집 구경하러 다니는 것이 영화구경보다 재미있다고 소문내고 다녔던지라 그런 정보는 내 안테나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그러나 막상 내촌 목공소를 구경 갈 기회는 잘 오지 않았다. 내촌면은 홍천읍을 지나 산골짜기 깊숙이 숨어 있었다. 홍천경찰서가 길가에 붙인 구호 ‘억울한 사람 없는 홍천만들기’는 좀 씁쓸했다.

동행한 사진기자 권태균은 “길을 뚫고 군부대를 만들고 하는 과정에서 딴은 억울한 사람이 많이 생기기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내촌면의 한자는 내촌(內村)이 아니라 내촌(耐村)이다. 평균기온이 낮아 겨울이 유난히 긴데다 도로가 포장된 지 10년밖에 안 된다니, 이 고을 사람들은 참아야 할 일이 유독 많았던가보다.

그 내촌에 봄이 오고 있었다. 이정섭의 작업실 앞 개울가에는 제법 큼직한 귀룽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거기에 바야흐로 싹이 트는 중이었다.

“저게 귀룽나무라는 것은 이윤기 선생의 책을 읽고 알았어예. 기막힌 나무라예. 봄에 흰 꽃이 피는데, 그게 피면얼 마나 좋은지….”

멀리서 온 객을 반기는 이정섭의 인사다. 길가 물웅덩이에서는 개구리가 알을 낳느라 요란하게 울었다. 개구리 울음과 개울물 소리로 골짜기는 거의 요란할 정도로 소리로 가득 찼지만 그 소리는 주변을 희한하게 고요하게 만들었다. 배에 알이 가득찬 개구리는 몸이 무거워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못했다. 모처럼 부화하기 직전의 개구리 알이 웅덩이에 온통 허옇게 덮여 있는 것을 구경했다. 웅덩이는 곧 재빠르게 헤엄치는 까만 올챙이들로 가득 찰 것이다.

내촌목공소는 세 부분으로 나뉜 집이었다. 입구의 사무실 겸 작은 전시실과 온도·습도가 쾌적하게 조절되는 중간의 너른 작업장과 잇대어 나오는 큰 전시실, 문밖의 야외 목재창고, 그리고 안쪽 산기슭에 스물대여섯 평 되는 살림집이 하나 붙어 있다. 입구 쪽에는 지금 별채 전시실을 따로 한 채 짓는중이었다.

물론 이들 집은 목수 이정섭이 나무를 깎고 흙을 이겨 혼자 다 지은 것이다. 장식 없이 단순하고 밝은 외형에 안으로 들어가니 독특하고 쓸모 있고 세련된 공간이 나타났다. 특히 나무냄새가 코를 찔렀다. 온통 나무였다. 천장에는 건조 중인 나무, 바닥에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 기둥과 서까래와 창틀의 나무, 그 빛깔을 보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왠지 아주 쾌적하고 안락해졌다.

“나무 향에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인간 DNA에 진작 각인된 원시 반응이랍니더. 〈희랍인 조르바〉에서 읽었어예.”

그윽한 나무 향에 둘러싸인 내촌목공소

목수 이정섭은 억양과 말의 어미(語尾)는 남쪽 사투리를 쓰면서 어휘와 강약은 서울·경기식으로 부드럽게 발음하는 독특한 언어를 구사했다. 그것이 나뭇결과 나무향과 절제된 내부 공간에 어울려 내촌목공소의 분위기를 이루는 주요구성요소가 됐다.

우리는 목재창고·전시실·작업장·살림집을 찬찬히 살피며 원목과 그가 만든 가구, 다른 살림살이들을 구경했다. 이것은 호두나무, 또 이것은 물푸레나무, 저것은 참나무, 그것은 느티나무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한국 소나무. 빛깔이 다 달랐고 무늬와 촉감과 냄새가 다 달랐다.

그것으로 만든 의자와 키큰 테이블과 앉은뱅이 탁자들을 만져 보고 냄새 맡고 두드려 보면서 마음속에 희한한 평화가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나무란 것이 이렇게나 좋구나! 베어 내도 나무는 살아 있구나!

“가구 만드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뭔지 아세요?”

당연히 목수의 솜씨겠지. 그런데 아니란다.

“나무가 80%라예. 좋은 나무는 좋은 가구가 되고, 나쁜 나무는 나쁜 가구가 됩니더. 목수의 개입은 20%밖에 안 되지예. 목수의 역할은 나무를 있는 그대로 잘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는 게 제 생각이라예. 공정 중에서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부분이 나무를 말리는 겁니더. 소나무는 5년 이상 말려야 하고, 수입목도 바깥에서 1년, 실내에서 1년을 말려야 해예. 그래야 틀어지지 않습니더. 지중해에서 원목가구를 수입하던 업체들이 철수한 이유도 다 그거지예. 그 나라와 우리의 기후와 실내습도가 안 맞으니 다틀어져 버려예.”

그렇게 결정적인 나무를 말리는 방법을 이정섭은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지 않았고, 어떤 선배 목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바깥에서 2년을 말려도 실내에 들어와 습도가 달라지면 금방 터져 버려예. 가구를 둘 실내의 습도에 맞추려면 반드시 실내에서 말려야 하는데 처음에는 그걸 몰랐지예. 우리 소나무는 팽창과 수축이 많아 집 짓는 데는 좋아도 가구 만드는 데는 안 좋아예. 여기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예. 목재창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목수되고 한 2년 있다 알았습니더. 나무를 미리 확보해 두지 못하면 가구 못 만들어예. 종류별로 충분히 비축해 두고 충분히 말려 놔야주문을 받을 수 있겠더라고예.”

그가 이 골짜기로 들어온 것은 올해로 6년째다. 목공소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이제 슬슬 이정섭표 가구를 사고 싶어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지난해 7월 인사동 쌈지길의 ‘갤러리 숨’에서 내촌목공소 이름을 달고 전시를 했다. 첫 전시 였다. 반응이 썩 좋았다. 그때 선을 보인 이후 지금까지 총 20개의 테이블을 팔았다.

목수는 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그만하면 많이 판 거라예. 그러나 가구를 만들어 파는 게 최종목표는 아닙니더.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지예. 내촌목공소가 ‘겁나’ 유명해져 ‘겁나’ 돈을 벌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어예.”

그것을 알아내자면 이정섭이라는 한 인간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그에게는 어린이와 청년과 원숙한 성인이 동시에 있었다. 표정도 말씨도 풀어놓는 생각도 두루 그랬다. 천진하지만 동시에 의연했고, 여리면서 한편 강인했다.

이정섭은 “라이프 스토리는 제발 쓰지 마세요”라고 부탁하지만 서른여섯, 한창 진행 중인 그의 삶의 궤적에서 앞으로의 지향을 읽어 낼 수밖에…. 그에게 자꾸 이야기를 시켰고, 다변이 아닌데도 이정섭은 의사전달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그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사용하는 ‘겁나’ 라는 부사가 나는 흥미 진진했다.

‘열나’와 같은 돌림자의 유행어일텐데, ‘열나’가 경박하다면 ‘겁나’는 진지했다. 열나가 과장이라면 겁나는 응축이 었다. 열나가 허세라면 겁나는 결곡이었고, 열나가 외향이라면 겁나는 내향이었다. 그 겁나의 진지와 응축과 결곡과 내향이 이정섭이라는 고집스럽고 성정 바른 인간 안에서 발현되고 변용되는 모양을 나는 몹시 흥미롭게 지켜봤다.

사투리에서 짐작했둣 그는 경상도에서 태어났다. 마산이었다. 19기년생. 아버지는 장학사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누나와 형을 둔 안정된 집안의 차남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별종 끼가 있었다. ‘라이프 스토리’를 워낙 경계하니 마음대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짐작하건대 남들과 한 줄로 늘어 서서 똑같은 원칙과 잣대로 재단되는 것을 유난히 못 견디는 기질이었던 것 같다.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다. 두 살 위 형이 하도 특출나게 전교 1등만 하고 다녀 지레 맥이 빠졌는지도 몰랐다. 그는 학교교육이 창의성을 말살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받을수록 제 안의 창조적 에너지가 증발된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주 학교를 뛰쳐 나가고는 했다.

“사춘기가 늦게 왔어예. 턱없이 용감했지예.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하니 11시만 되면 배가 고파 오잖아요? 학생들이 배고픈 시간에 점심시간을 배치하는 게 당연한데 그러지 않는 게 잘못이니 잘못된 제도를 따르지 말자면서 도시락을 일찍 까먹어예. 죄 짓는 것도 아닌데 비굴하게 숨어서 밥을 먹을 이유가 없으니 도시락을 책상 위에 척 꺼내 놓고 먹지예. 그러면 자동으로 반항적인 문제학생이 되지예. 학교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범죄집단 같았어예. 그걸 그대로 따라서는 나도 방조죄에 해당한다. 내 이력에 전과를 만들 수는 없다면서 학교를 뛰쳐나갔지예. 아버지가 관할 장학사니 쉽게 잘리지는 않았는데, 하도 도망가니 나중에는 내버려두데 예. 도망가면 잡으러 오고, 붙잡아 놓으면 또 도망가고…. 그래도 그때가 솔직하고 진지했어예. 지금은 소프트랜딩해서 사는 건데, 그때에 비해 (진지함의 농도가) 30%도 안 되지예.”

이정섭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스터 그리기 대회 같은 것을 하면 늘 1등상을 타고는 했다. 선천적인 형태감각이 있었다.

“그림은 재주가 아니라예. 대학입시를 석고 데생으로 봐서 그렇지, 그림 그리는 데 사실 데생력은 별 필요 없거든예. 누구나 그릴 수 있어요. 절전이나 환경보호 포스터 대회 같은 데서 1등을 한 건 색칠할 때 선 밖으로 삐쳐 나가지 않게 칠하는 기술 때문이었지 다른 재능이 아니었거든예. 어려서부터 우표수집을 한 덕분이지예. 각종 포스터를 위한 모든 것이 우표 안에 다 있었던 겁니더. 구도도 색깔도 메시지도 우표에서 본 대로만 그리면 됐어예. 마산 1등 아니라 경남 1등 하지예! 그림은 공부 잘하는 우리 형이 더 잘 그렸어예. 형은 추수하는 사람을 안 보고도 그리는데, 나는 사진을 앞에 놓지 않으면 못 그린다는 말입니더. 생각이 안 떠올라예. 나 같은 사람은 화가가 될 재목이 아닌 거라예.”

그가 가장 결벽스럽게 구는 부분이 그림에 대해 말할 때다. 시종 시니컬하다. 내촌목공소 내벽에 걸린 그의 흑백 그림은 썩 훌륭했다. 어둡고 무겁고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보고 있는 내 가슴이 철렁해졌다. 하도 진지해 불온하다고 할 만했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학교를 그만뒀지만 몇 해 지나니 느닷없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잘 그린다고 소문난 학생이 었으니 미술대가 적당할 듯했다.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서울로 올라가 석 달 학원 다니다 서울대에 응시한다. 이 부분, 그의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다.

“서울대 시험을 어떻게 보는지 알 필요가 있었거든예. 눈치 볼 것 없어 맨 처음 신청했더니 1번이 됐고, 1번은 왼쪽에 앉아 석고 데생을 하더라고예. 그걸 알았으니 돌아와 1년 내내 왼쪽에서 보이는 석고 데생 연습만 했지예. 다음해도 일찍 접수해 1번이 됐고, 1년 내내 연습했으니 뭐 쉽지예.”

그래서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학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회에도 참석하고 사회과학 책도 읽었다. 박노해의〈손무덤〉을 읽으면 내가 이 복수를 해야지 싶어졌지만 운동권 내부가 PD다 NL이다 하고 갈라져 갈등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훌책 군대로 가 버렸다. 제대 후 복학해서는 그림 대신 사진에 관심을 뒀다. 종일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앉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찍었다. 공공미술에 관심이 있었다.

이정섭은 그림으로는 못 먹고 살 것 같고, 웨딩사진이라도 찍어야 먹고 살 것 같아 사진으로 전환했다고 위악을 부렸다. 하지만 형태감을 타고난 사람이 카메라라는 새롭고 절망적인 매체를 만났으니 정면승부를 감행하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날마다 지하철 2호선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넘쳐나는 끼로 학교교육에 적응 못해

“저 표정들이 어둡다고요? 요새도 지하철 속 사람들 모습이 답답하고 지루하고 피곤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던데예.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숱한 사진을 찍었지만 졸업 전시회에 사진은 작품으로 인정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졸업전을 위해 할수 없이 사진 몇 장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리다 보니 꽤 흥미로웠다. 자꾸 그렸다. 미술이 삶에 구체적인 해답을 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행인 각자에게 자신을 관조하게 할 수 는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일정한 몫을 해내는 것 아닌가?

그는 자신의 그림을 행인이 많은 공공장소에 걸고 싶었다. 갤러리 안에 걸어 놓고 특정인에게만 보여 주는 그림이 되는 것은 싫었다. 지하철 통로에 그림을 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 입구 역사 안, 노숙자들이 밥을 타먹는 긴 통로를 전시 장소로 점찍었다. 그곳의 관리자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었다. 어두운 얼굴의 시민들을 되비쳐 주는 것을공단측이 찬성할 리 없었다.

장소 임차에 온갖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거기서 전시를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노숙자 몇과 친해졌고, 행인들이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제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단 한 번 전시 이후 그는 그림을 접는다.

대학에서 만난 선배 중에 신상응이라는 이가 있었다. 지금도 이정섭은 그에게 거의 존경에 가까운 외경을 품는 듯 보인다.

타고난 형태감각으로 미술과 사진에 심취해

“신상웅 형은 지금도 나의 고1 시절처럼 살지예. 삶이 뭐냐? 솔직하고 진지해야한다. 그러면서 한치 흔들림이 없어 예. 신 선배가 요즘 나의 억압기제입니더. 나는 돈 벌 테니 생각은 형이 해라, 미뤄 놓고 나는 이렇게 소프트랜딩했어예.”

그 신상웅이 첫 번째 연 내촌목공소 전시의 브로슈어에 서문을 썼다. 그런데 그 서문에는 둘이 무엇무엇을 요리해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밖에 안 나온다. 술안주로 비워 낸고 막 껍질이 패총을 이뤘다는 둥, 목수 일을 배운 후 그의 아버지 사시는 시골집을 짓는 동안 동태 한 짝과 과메기 한 두름을 해치웠다는 둥…. 하긴 내촌 목수도 먹는 이야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럽다.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도 아주 잘한다.

“1주일에 한 번 속초 중앙시장에 가는데, 시장에 들어서면 일단등줄기에 전율이 느껴져예.”

갈치 철에는 일부러 제주도에 가서 1년 먹을 갈치를 사 오고, 조기도 1년치를 한꺼번에 사 와서 김치냉장고에 손질해 넣어 두고 요리해 먹는 것을 큰 낙으로 친다.

“나는 다른 건 대충 넘어가는데 까다로운 게 딱 두 가지 있어예. 나무 고르는 거하고 국물 낼 재료 고르는 거지예. 그 둘은 절대 최고 아니면 안 돼예. 나무 보러 가는 게 워낙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어시장 가는 거라예.”

그에게 ‘디포리’ 라는 생선국물로 끓인 떡국과 조기찌개를 얻어먹었다. 디포리라는 생선이름을 처음 듣는다고 했더니 그는 상종 못할 인간이라도 봤다는 듯 펄쩍 뛴다.

“아니 디포리를 모른다는 말이에욧? 그래 가지고 무슨 글을 써욧?’

얼른 냉장고로 달려가 디포리 봉지를 꺼내 와 보여 준다. 멸치보다 훨씬 큰, 등 푸른 말린 생선이다.

“국물 내는 데는 이게 최고라예.”

뚜껑 덮인 밀폐용기로 여남은 통씩 디포리 국물을 우려내 놨다. 180cm가 넘는 커다란 남자가, 목수 일로 골격이 잘 다 져진 건장한 청년이 디포리 국물에 저토록 열을 내는 꼴이 나는 슬슬 통쾌해졌다.

그는 TV를 보지 않는다. 신문도 물론 안 본다. 컴퓨터도 아예 안 배웠다. 그러면서 깊은 산골짜기에서 혼자산다. 그러니 아침 8시부터 나무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온종일 딴 생각 않고 다른 일에 전혀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 나무하고만 뒹굴고 논다. 노동과 휴식, 여가와 오락을 전부 나무와 더불어 해결한다.

“텔레비전을 안 두는 거예? 내가 워낙 자제력이 없어예. 그걸 한번 붙들면 아마 온종일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을 겁 니더. 그래서 아예 없했지예. 아침 8시에 일을 시작하면 하루 12시간, 어떤 때는 18시간,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지예. 회사 다니는 자들은 일이 100이고 예술가들은 놀이가 100이라면 목수는 일과 놀이가 50대 50쯤 되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어예. 근데 내 하고 싶은 대로 만들지 않고 팔릴 걸 생각하고 만들면 일의 비중이 커져 버려예. 요새는 일이 더 커예.”

6월에 전시 일정을 잡아 놨다. 서울 사간동 선화랑에서 ‘내촌목수전’을 열 예정으로 지금 몹시 부산하다. 내촌으로 들어오기 이전 한 시절, 그는 집 짓는 목수였다. 아니 내촌 와서도 처음에는 나무집을 지으러 다녔다.

“우연히 〈내 고향 6시〉인가 하는 프로에서 한옥 짓는 걸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예. 당장 태백으로 내려갔지예. 농사에 관심이 있었고 유기농해서 스타 되자는 게 아니라 내 먹고살 농사 지으며 농한기에 목수 일이나 하면 좋겠구나 싶었거든예.”

거기서 한옥 짓는 법을 배운다. 지금 내촌목공소가 나무를 접속하는 방법인 ‘사괘맞춤’도 그때 한옥 짓기 수업에서 배운방법이다. 배워서 한동안 남의 집 지어 주는 일을 했다. 충주댐 근처에 들어가 살면서 여섯 채 정도의 한옥을 지었다. 그러나 집 주인과의 의견충돌을 조율하기가 난감했다.

“나는 한옥이라고 부르지 않고 민가라고 부르지예. 한옥이라면 다들 기와 얹은 부잣집만 연상하는데, 실제로는 기와집 아닌 초가 얹은 흙집이 훨씬 더 많았을 거 아닙니꺼? 그 흙집 민가가 어디 나쁜 집이겠습니꺼? 그런 소박한 집을 짓고 싶었어예. 똑같은 모양의 전원주택을 짓고 싶지는 않았어예. 나는 전통에는 관심 없어예. 부석사 무량수전을 짓는 목수만 훌륭한 목수이겠습니꺼? 모범답안이 미리 정해 져 있고 거기에 맞춰 집을 짓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예. 전통의 정수는 지니고 있되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우리 민가를 짓고 싶었지예. 일본은 그게 성공했는데 우리는 안 됐지예. 흙과 나무로 지은 우리식 민가를 여기저기 만들고 싶었어예.”

참나무 빛깔이 가장 사랑스러워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집은 주인의 요구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집 짓는 것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볼 도리는 없었다.

“불가능하지예. 한두푼드는 일도 아니고 내 돈 들여 내 마음대로 지어 놨다 안 팔리면 그땐 어쩝니꺼. 가구로 ‘겁나’ 유명해지면 그때는 내가 원하는 전통 민가를 지어보려고예.”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야 그간의 고민과 모색이 읽힐텐데, 이정섭의 말을 뉘앙스 그대로 옮길 재주가 없어 안타깝다. 아무튼 그래서 그는 대목에서 소목으로 직업을 바꿨다. 나무 만지기에 이력이 났고, 나무 만지기가 좋아 가구 만지는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가끔 필요해서 작업실 칸막이도 만들어 보고, 의자도 뚝딱 못 박아 만들어 본 적 있으니 자신은 있었다.

지금 내촌목공소의 가구는 지극히 단순하다. 두텁고 질박하다. 그의 주장 그대로 나뭇결을 가장 잘 보여 주기만 한다. 사괘맞춤으로 접합하고, 천연수지 본드를 쓰고, 필요하면 튼튼하게 나사못도 박아 넣는다. 나사못 자리에는 동그랗게 혹은 네모지게 나무로 마감해 넣는다.

“보기 좋은 못이 나오기만 하면 못이 보여도 상관없어예. 나는 가구가 이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해예. 내가 무슨 탁자에 용 다리를 새겨 넣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고 깨끗하게 나무의 본모습을 보여 주는 게 제일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예.”

참죽나무·호두나무·개암나무·육송·물푸레나무·느티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내촌 목수는 참나무 빛깔을 가장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참죽나무는 너무 붉고, ‘메이플’은 너무 희지예. 같은 물푸레나무 중에서도 나뭇결이 촘촘한 최상급은 원목 한 차 실어 와도 테이블 하나 만들 분량밖에 안 나와예.”

그래서 내촌목공소 가구는 가격을 세 등급으로 구분해 뒀다. 보통 크기 책상 하나 만들려면 나무 사서 2년 정도 말린 후 자르고 끼우고 다듬고 칠하고 꼬박 열흘 정도 작업 공정이 소요된다. 가격은 일괄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250만원정도?

그는 가슴 안에 사랑과 의지가 넘쳐나는사람이다. 더 나은세상을 위한 오랜 모색이 절로 읽히는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고등학교 보건교육만 제대로 시키면, 그 안에 약초·침·뜸 같은 전통의학의 초보 과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집어 넣으면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고, 집 짓기도 가구 만드는 일도 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즐거운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 안에 삶의 큰 즐거움이 있는데 다 놓쳐 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전에는 집 짓고 기구 만들고 하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었잖아예? 고향에 가면 목수 아닌 큰아버지가 수십 년 전에 지은 집이 아직 튼튼하게 남아 있거든예. 전문 영역을 정해 놓고 일부 사람만 그걸 되풀이하고 나머지는 다 돈 주고 사야 하는 자본주의 구조가 못마땅해예. 나는 그런 면에서 철저히 반자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예. 비숙련공의 정성 어린 노동이 없어져 버렸어예. 그러니 좋은 건축물이 나올리 없지예. 그저 좋은 설계만 있을 뿐이지예. ‘폐이퍼’ 안에서 는 나무의 질감이 살아날리 없거든예.”

한때는 장애를 가진 이들과 한동안 같이 지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일하고 싶었다.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겁나’ 돈을 벌면 하고 싶다는 일도 바로 그 일 같다.

“비장애인의 능력이 100이라면 장애인도 20이나 30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더. 장애인을 위한 사업이나 교육은 그 20이나 30을 제대로 쓰게 해 주는 것이 돼야지, 5도 못 쓰게 해서는 도와 주는 게 아니거든예. 친구 중에 천주교 수사하다 그만두고 장애인과 변소 푸러 다니는 자가 있어예. 나는 그걸 못해도 그게 옳다는 건 알아예. 그런 자들을 지원하고 싶지예.”

대안학교도 꿈꾼다. 남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대안 학교가 아니라 아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들 희망을 품고 있다.

그는 어쨌든 재주 좋은 청년이다. 스스로 말하듯 호모 에코니쿠스 기질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먼 길을 돌아오기는 했지만 내촌 땅 1,000여 평을 구해 집과 목공소와 전시실을 지었고, 가구 제작에 필요한 온갖 설비들도 웬만큼 갖췄다. 최근에는 내촌목공소의 정신을 사랑하는 이가 과감히 투자해 줘 경제적 안정도 얻었다.

이제는 나무창고에 최상급 나무를 가득 쌓아 말릴 수도 있게 됐다. 결국 “되고 싶은 것은 뭐예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약간 상기해서 “나라고 가구의 반가사유, 목가구의 석굴암 부처, 그딴 걸 만들고 싶은 욕심이 없겠습니꺼”라고 말한다.

한 달 전 그는 ‘리빙 디자인 페어’ 에 가구 10여 점을 출품했다. 일본 원목 가구계의 대가 ‘조지 나카시마’ 가 참여한다기에 일부러 부스를 그 곁에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지 나카시마 곁에 놓인 내촌목공소 가구들이 꿀렸던가? 전혀 아니었다. 더 간결하고, 더 결이 곱고, 더 품격 있고, 더 고요했다.

장애인 돕고 대안학교 세우고 싶어

“조지 나카시마 가구가 이번에 모조리 팔렸대요. 테이블 하나에 3,000만 원, 장 하나에 1억 원 하는데도…. 눈 뒤집 힐 일이지예. 그러나 ‘브로슈어’에 나오는 사진을 보니 와, 정말 부럽데예. 빛이 45도 각도로 확 들어오는 작업실에 나카시마가 서 있는데, 뒤쪽에는 평생 쓰고 남을 목재가 확 쌓여 있데예. 평생 한 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의 얼굴이라는 게 확실히 읽히데예.”

우리는 나무로 무엇을 만드는 일에서는 세계 최고다. 손 재주도 그렇고 목질도 그렇다. 조선 목가구의 질감과 균형과 비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이미 세계가 떠들썩한 공감을 끝낸 일이다. 우리 산천에 지금 좋은 소나무가 남아 있지 않다는 현실은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관심을 기울이면 풀 수 있는 숙제일 것이다.

목수 이정섭에게 바란다. 우리 가구를 세계에 내다 파는, 세계적 장인이 돼라! 그래서 ‘겁나’ 돈을 벌어 그가 원하는 ‘민가’도 실컷 짓고, 대안학교도 만들고, 장애인의 삶을 격상시킬 프로그램도 원없이 만들어 실행하고, 제주 갈치도 실컷 사서 신나게 요리해 친구들과 나눠 먹어라! 내촌목공소가 싱그러운 나무냄새 풍기는 활력 넘치는 문화와 삶의 진앙이 돼 주기를! 젊은 목수 이정섭을 사랑하는 이들은 다 같이 바란다.

필자 김서령

1956년생으로 경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구 중앙증학교 교사 와〈매일경제신문〉〈샘이깊은물〉객원기자로 활동했다. 1988년 동서문학 신인상(수필 부문)을 수상했다.

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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